중증응급의료 현장을 지키는 전문의들의 '잔류'가 단순한 사명감이나 희생정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환자의 회복에서 느끼는 보람과 의료진으로서의 전문성, 동료와의 관계 등이 현장을 지키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과로와 만성적인 인력 부족, 낮은 수가, 사법리스크 등 구조적 문제가 지속될 경우 현장을 떠날 가능성도 함께 고려하는 '조건부 잔류'로 나타났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은 건국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교실 김강문 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은 '구조적 역경 속에서의 자발적 잔류: 중증응급의료 전문의들의 내적 동기 탐구'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중증응급의료 현장에서 구조적 어려움을 경험하면서도 진료를 지속하고 있는 임상 교수들의 경험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이들이 어떤 이유로 현장에 남아 있는지, 또 그 동기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진행됐다.
연구진이 전문의들의 경험을 분석한 결과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하기'였다.
중증응급의료는 환자의 상태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신속한 판단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여기에 야간·휴일 근무와 높은 업무 강도, 인력 부족 등이 겹치면서 의료진의 부담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연구 참여자들은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보람과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 때문에 진료를 이어가고 있었다. 전공에 대한 만족감과 함께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신뢰와 연대 역시 현장을 버티게 하는 중요한 힘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연구진은 이러한 긍정적인 요인만으로 전문의들의 잔류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현장에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과로, 지속 가능한 진료체계의 부재, 낮은 수가, 과도한 사법리스크 등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역의 응급의료체계가 약화되면서 일부 의료진에게 업무 부담이 집중되는 구조 역시 전문의들의 지속적인 근무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분석됐다.
이번 연구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전문의들의 잔류가 무조건적인 헌신이 아니라 '조건부 잔류'라는 점이다.
연구 참여자들은 환자와 의료현장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진료를 계속하면서도, 현재의 근무조건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진료를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즉, 현장에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의 근무환경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의 직업적 가치관과 전문성, 환자와 동료와의 관계 등이 구조적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완충 역할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조직적·제도적 조건이 무너지면 잔류 역시 지속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결과가 중증응급의료 인력 정책의 방향을 다시 살펴볼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중증응급의료 인력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료진 개인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대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연구의 핵심 메시지다.
특히 전문의들이 현장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동시에, 과도한 업무 부담을 줄이고 안정적인 인력 확보가 가능하도록 진료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의료진이 환자 진료 과정에서 감당해야 하는 사법적 위험을 줄이고, 중증응급의료의 특성을 반영한 적정 보상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제시됐다.
연구진은 심층면담 분석을 통해 총 81개의 하위 범주와 14개의 상위 범주를 도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증응급의료 전문의의 내적 동기를 개인의 직업 정체성과 소명의식, 전문성과 성장, 환자·동료·후학과의 관계, 일과 생활의 경계 설정 등으로 구분했다.
이 같은 동기 유형은 모든 전문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성향이나 경력 단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중증응급의료 전문의 인력 정책이 개인의 헌신에 의존하기보다 지속 가능한 근무 환경과 제도적 보호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어 "이번 연구에서 도출된 내적 동기 유형은 개인의 동기 특성과 경력 단계에 적합한 맞춤형 동기 지원 전략과 교육과정 개발, 의료인력 통합 전략을 수립하는 데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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