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지정제 둘러싼 의료계 인식 변화…"폐지·완화 논의 시작해야"
미래의료포럼·병원의사협의회, 의사 647명 조사…86.9% 폐지 또는 선택적 단체계약제 찬성
98.6% "현행 수가, 의료기관 지속가능한 운영에 불충분"…92.0% "의료계 공식 의제로 다뤄야"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를 둘러싼 의료계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현행 제도가 의료기관의 진료·재정적 자율성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당연지정제를 폐지하거나 선택적 계약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래의료포럼과 대한병원의사협의회가 지난 6~7월 의사 64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요양기관 당연지정제에 대한 의사 인식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6.9%인 562명이 당연지정제의 전면 폐지 또는 선택적 단체계약제 도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응답자의 84.7%는 향후 당연지정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하고 선택적 계약제를 도입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답했으며, 92.0%는 당연지정제 문제를 의료계가 공식적인 정책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번 설문은 최근 비급여 관리 강화와 관리급여 도입, 건강보험 심사·삭감 강화 등으로 의료기관의 진료 및 경영 자율성이 축소되고 있다는 의료계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98.6% "현행 건강보험 수가, 의료기관 운영에 불충분"
현행 건강보험 제도가 의료기관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도 매우 높았다.
응답자의 98.6%가 현행 건강보험 수가가 의료기관의 지속가능한 운영에 충분하지 않다고 답했다. 또한 98.3%는 비급여 통제와 관리급여 도입, 심사·삭감 강화 등 최근 정책 변화로 의료기관의 재정적 자율성이 줄어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행 당연지정제가 의료기관의 운영과 의료인의 진료 자율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응답도 96.0%에 달했다.
이는 당연지정제가 단순히 건강보험 가입자의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는 제도를 넘어 의료기관의 경영과 진료 전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조라는 인식이 의료현장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는 게 조사 주최 측의 설명이다.
당연지정제 폐지 또는 완화가 의료기관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77.1%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국민의 의료 접근성과 형평성에 대해서는 37.4%가 악화 가능성을 우려했다.
의료계 역시 제도 개편에 따른 부작용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단순히 당연지정제를 폐지하는 데 그치기보다 필수의료와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보장을 유지하면서 의료기관의 계약 선택권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강제지정 아닌 선택적 계약제로 전환해야"
설문 결과를 공개한 미래의료포럼과 병원의사협의회는 현행 당연지정제를 '강제지정'에서 '자율계약' 중심의 건강보험 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수호 미래의료포럼 대표는 이번 조사와 관련해 의료계 내부에서 공유할 수 있는 장기적인 목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 대표는 "의사들이 가야 할 큰 목표 가운데 하나가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폐지라는 의료제도의 큰 목표"라며 "이번 설문조사를 통해 일반 회원들이 당연지정제 폐지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 결과를 의료계에 알리기 위해 조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는 미래의료포럼이 대한병원의사협의회에 설문조사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미래의료포럼은 전국적인 회원 조직을 기반으로 한 단체라기보다 뜻을 같이하는 의사들이 모여 활동하는 형태인 만큼, 대한병원의사협의회의 회원 기반을 활용해 의료현장의 인식을 확인했다는 설명이다.
헌재 합헌 판단 이후 20여년…"당시 전제조건 달라져"
당연지정제 개편 주장의 근거로는 헌법재판소의 과거 결정도 제시됐다. 현행 국민건강보험법 제42조는 의료법상 의료기관을 원칙적으로 건강보험 요양기관으로 편입하도록 하고 있다. 제45조에 따라 건강보험공단과 의료계 대표가 체결한 수가계약은 개별 의료기관과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체계에 참여할지 여부 자체를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료계에서는 이를 사실상 강제계약으로 보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02년과 2014년 요양기관 당연지정제에 대해 합헌 판단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국민의 의료보장과 의료 접근성 확보라는 공익적 목적 등을 고려해 제도의 합헌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료인의 직업수행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라는 점을 함께 고려했다.
특히 의료계는 당시 합헌 판단에 비급여 진료의 가능성, 환자의 의료기관 선택 가능성, 건강보험 수가의 합리적 조정 등이 중요한 전제로 작용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주 대표는 "당연지정제를 합헌으로 판단했던 당시와 현재의 의료환경은 크게 달라졌다"며 "비급여 보고제도와 관리급여 도입 등으로 비급여 영역에 대한 정부의 관리가 강화되고 있는 데다, 수가 역시 의료기관의 비용과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당연지정제의 합헌성을 뒷받침했던 전제들이 현재도 유지되고 있는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당연지정제 폐지해도 필수의료·취약계층 보호해야"
다만 의료계가 당연지정제 폐지 또는 완화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설문에서 37.4%가 당연지정제 폐지 또는 완화 시 국민의 의료 접근성과 형평성이 악화될 가능성을 우려한 만큼, 향후 제도 개편 논의에서 국민 의료보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가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의료계가 제시한 방향은 선택적 단체계약제다. 필수의료와 취약계층에 대한 기본적인 의료보장은 국가가 책임지는 동시에, 의료기관과 보험자가 실질적인 협상을 통해 건강보험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수가만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급여기준과 심사기준, 계약조건 등을 의료계와 보험자가 함께 논의하는 대등한 계약구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또 협상이 결렬될 경우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중재 절차를 마련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미래의료포럼과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당연지정제 개편 논의를 의료계와 정부의 공식 정책 의제로 올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개편의 공식 정책 의제화 △필수의료와 취약계층 보호를 전제로 한 선택적 단체계약제 시범 도입 △수가·급여기준·심사기준·계약조건에 대한 실질적인 협상체계 구축 △협상 결렬 시 독립적 중재제도 마련 등을 제안했다.
이번 설문은 의사 64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라는 점에서 의료계 내부의 당연지정제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의미가 있다.
특히 응답자의 10명 중 9명 이상이 당연지정제 문제를 의료계가 공식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답했다는 점에서, 당연지정제 개편 논의가 일부 의료계 인사의 주장을 넘어 정책적 논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다만 건강보험의 지속가능성과 국민 의료 접근성, 필수의료 유지라는 공적 가치가 걸려 있는 만큼 당연지정제 폐지 또는 완화가 실제 제도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의료계 내부의 추가적인 논의와 함께 정부·보험자·가입자 등 이해관계자 간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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