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의료 현장에서는 비의료인의 상담시장 확대와 행정 규제 강화, 정신치료 삭감, 향정신성의약품 처방 위축 등 다양한 문제가 동시에 불거지고 있다. 여기에 비대면 진료와 AI 기반 심리상담, 디지털 치료제 등 새로운 기술까지 빠르게 진입하면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의 안전성과 전문성을 둘러싼 논쟁도 커지고 있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제16대 회장으로 취임한 조근호 신임 회장은 이 같은 변화 속에서 '의료전문가주의 수호'와 '회원 보호', '의사회 내부 소통 강화'를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특히 전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에 대해서는 "양적 확대보다 서비스의 질과 의료기관과의 연계가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하며, 고위험군 환자가 적기에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체계 구축을 강조했다.
또 향정신성의약품 규제와 관련해서는 불법 오남용을 차단하는 동시에 정상적인 치료 목적의 처방까지 위축시키는 '규제의 역설'을 경계했다. 비대면 진료와 AI·디지털 치료제에 대해서도 정신건강의학의 특수성을 고려해 전문의의 임상적 판단을 중심에 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협회 출입기자단은 최근 조 회장과 인터뷰를 통해 새 집행부가 추진할 주요 정책과 정신건강의료 현안, 회원 보호 방안, 국민들의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을 들어봤다.
조근호 회장은 새 집행부의 최우선 과제로 의료전문가주의의 수호를 꼽았다.
그는 "이는 단순한 의사들의 권익 보호가 아니라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근거에 기반한 가장 안전한 치료를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한 필수 전제"라며 "무분별한 비의료적 개입으로부터 환자를 보호하고, 개원가와 병원급 의료기관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면서 중증·응급 환자도 제때 치료받을 수 있는 정신의료체계를 회복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회원들을 위한 실질적인 보호막 역할도 강조했다. 최근 정신치료와 척도검사, 각종 검사에 대한 대대적인 삭감 우려가 진료 현장을 위축시키고 있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특별사법경찰제도 도입과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향정신성의약품 관리 강화 역시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행정 편의주의적 간섭을 철저히 막아내고 회원들이 소신껏 진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사회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개원의가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선배와 신규 의사, 봉직의까지 아우르는 소통 구조를 만들겠다고 언급했다. 조직의 체계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고 대관·대외협력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국민과의 접점을 넓히면서, 외연을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직의 내실을 다지겠다는 포부다.
"전국민 마음투자 사업, 양적 확대보다 질적 개선 필요"
정부의 전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에 대해서는 보다 강한 목소리를 냈다. 사업의 당초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현재 사업이 실질적인 정신건강 지원보다는 바우처 실적 중심의 양적 확대에 치우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가장 큰 문제로 상담 서비스 제공 인력의 질 관리와 의료기관과 상담기관 사이의 연계 부족을 꼽았다. 조 회장은 "정작 중증도 평가와 의학적 치료의 핵심이 돼야 할 정신건강의학과 의료기관이 바우처 신청을 위한 소견서 발부 창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며 "정부가 사업의 규모를 확대하기에 앞서 검증된 전문가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질적 관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의료기관과 상담기관이 환자의 상태를 상호 공유하고, 상담 과정에서 고위험군이 발견될 경우 즉각적으로 의료기관으로 연결될 수 있는 쌍방향 의뢰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향정약 규제, 정상적인 치료까지 위축시켜선 안 돼"
향정신성의약품에 대한 정부의 관리·감독 강화에 대해서는 오남용 방지라는 정책 취지에는 동의하면서도 정상적인 치료 행위까지 위축시키는 규제는 개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조 회장은 신경정신의학회와 함께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들이 운전 등 일상생활에서 불필요한 오해나 법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약물 안전 운전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불법적인 약물 오남용은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지만, 정당한 치료 목적으로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까지 잠재적 위험군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특히 근본적인 낙인 해소를 위한 제도 개선도 추진한다. 현재 마약류 관리 체계에서 향정신성의약품이 불법 마약류와 동일한 범주에서 인식되면서 환자와 의료진 모두 불필요한 불안과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판단이다.
조 회장은 "안전한 치료용 약물과 불법적인 마약의 개념을 국민들이 명확히 구분할 수 있도록 대국민 홍보를 강화하고, 입법 당국과의 소통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비대면 초진·향정 처방은 엄격히 제한해야"
비대면 진료와 AI 심리상담, 디지털 치료제에 대해서는 기술 발전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의 특수성을 고려한 안전장치가 필수라는 입장이다.
조 회장은 "비대면 진료와 AI, 디지털 치료제의 도입은 거스를 수 없는 기술적 흐름"이라면서도 "환자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남용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비대면 진료를 통한 초진과 향정신성의약품 처방은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과 진료에서는 표정과 말투, 행동 등 화면으로 충분히 파악하기 어려운 미세한 비언어적 단서가 중요하고, 자·타해 위험성 평가 역시 대면 진료가 보다 안전하다는 설명이다.
챗봇과 AI, 디지털 치료제 역시 전문의를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보조적 도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전했다.
조 회장은 "디지털 기술은 의사의 진단과 치료를 돕는 도구일 뿐 전문의의 임상적 판단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프로토콜도 플랫폼에 적절하게 탑재돼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조 회장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이력 때문에 실손보험 등 민간보험 가입이나 보험금 지급에서 불이익을 받는 문제에 대해서도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과거에 비해 경증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환자의 보험 접근성이 일부 개선됐지만, 여전히 정신질환 진단코드만으로 자동 심사에서 탈락하거나 고가의 유병자 보험 가입을 유도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질환의 실제 중증도와 회복 상태를 반영하지 않고 단지 F코드라는 이유만으로 일괄 거절하는 관행은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보험 인수 심사 기준의 세분화와 투명화를 요구하고, 적절한 치료를 통해 관리되고 있는 경증 정신질환자가 일반 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방침이다.
조 회장은 "정신건강의학과가 국민에게 더 이상 두려운 진료과가 아니라 마음이 힘들 때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는 동네 마음 주치의가 돼야 한다"며 "국민에게 한 걸음 먼저 다가가는 의사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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