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10명 중 4명 인권침해…76% "신고 못했다"

폭언 88.9%·직장 내 괴롭힘 67.1%…"신고해도 달라질 것 없다"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10명 중 4명 이상이 최근 1년간 인권침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간호사 4명 중 3명 이상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신고해도 조직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가장 컸다. 인력 부족과 과중한 업무, 부족한 교육, 위계적인 조직문화와 미흡한 피해자 보호체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한간호협회 간호노동개혁위원회는 6일 열린 '의료기관 내 간호사 인권침해 예방과 근무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2026 의료기관 근무 간호사 근로환경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정미 간호협회 간호노동개혁위원회 위원장이 발표한 이번 조사에는 의료기관 근무 간호사 2105명이 참여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41.0%가 최근 1년간 인권침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인권침해 유형을 보면 폭언이 88.9%로 가장 많았다. 이어 직장 내 괴롭힘 67.1%, 성적 폭력 17.7%, 신체적 폭력 17.0% 순이었다.

문제는 피해 이후였다. 인권침해 경험자의 76.4%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대응하지 않은 이유로는 '신고해도 변화가 없을 것 같아서'가 83.8%로 가장 높았다. 승진이나 조직생활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응답도 36.7%였다.

가해자의 보복이 두렵다는 응답은 27.5%, 신고 절차를 몰랐다는 응답은 14.4%였다. 실제 신고나 대응에 나선 경우에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응 이후 기관의 변화가 없었다는 응답이 68.1%에 달했다. 가해자와 분리됐다는 응답은 12.7%, 공식적인 조치가 이뤄졌다는 응답은 7.4%였다. 문제가 해결되거나 상황이 개선됐다는 응답은 2.5%에 그쳤다.

인권침해를 막기 위한 법과 제도가 마련돼 있어도 실제 현장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개인의 인내 아닌 구조 바꿔야"

이날 토론회에서는 인권침해를 개인 간 갈등이나 특정 직종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법과 제도가 진전되고 있지만 간호사들이 현장에서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며, 제도가 병원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위계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신고 이후 불이익이나 2차 피해를 우려해 침묵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이제는 이러한 문제를 개인의 적응이나 인내의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과중한 업무와 인력 부족, 조직 내 인권침해 문제를 언급하며 "이러한 문제를 더 이상 개인의 사명감과 인내에 맡겨둘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최보윤 국민의힘 의원은 환자와 보호자의 폭언·폭행뿐 아니라 부당한 업무지시와 업무 배제 등 다양한 형태의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피해 간호사에 대한 실질적인 보호와 회복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전종덕 진보당 의원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과중한 업무 부담을 인권침해의 주요 배경으로 지목하며 적정 인력 기준의 법제화와 실질적인 인권보호체계 구축을 제안했다.

현장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왔다. 대학병원 응급실 근무 경험이 있는 현장간호사 A씨는 간호사 간 갈등을 개인 간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구조적 원인을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신규간호사를 교육하는 프리셉터에게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환자 안전을 위한 교육이 질책과 괴롭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씨는 신규간호사가 질문할 수 있는 환경과 선배 간호사가 교육에 필요한 시간을 보장받는 근무체계, 환자·보호자의 폭언에 병원이 적극 대응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인력 증원'

이번 조사에서 간호사들이 꼽은 가장 시급한 개선과제도 구조적 문제에 집중됐다.

응답자의 80.7%는 인권보호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간호사 인력 증원'을 선택했다. 이어 법적 보호 강화 47.6%, 조직문화 개선 및 '태움' 근절 41.9%, 폭력 예방대책 강화 39.2%, 기관의 보호체계 강화 31.4% 순이었다.

신규간호사 교육에서도 격차가 확인됐다. 신규간호사의 58.7%가 부서 배치 전 교육을 1주일 미만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교육전담간호사 배치 역시 의료기관 유형에 따라 차이가 컸다. 일반병동에서 간호사 1명이 담당하는 환자 수도 의료기관 규모에 따라 최대 3~4배까지 차이가 난 것으로 나타났다.

간호협회는 이를 근거로 의료기관 종별과 환자 중증도, 간호요구도를 반영한 최소 간호인력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부도 예방부터 회복까지 대응체계 강화

토론회에서는 인권침해 발생 이후의 대응뿐 아니라 사전 예방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김성호 부소장은 가해자 처벌만으로는 반복되는 인권침해를 막기 어렵다며 적정 인력 확보와 교육체계 개선, 피해자 보호, 조직문화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오선영 정책국장은 인력 부족과 과도한 업무량, 감정노동, 폭언·폭행이 간호사의 소진과 이직으로 이어진다며 환자 대 간호사 비율의 법제화와 대체인력 확보, 교육전담간호사 확충 등을 제안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보건의료인력지원센터 양순원 부장은 피해 발생 이후 상담과 교육에 집중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직률 등 정량적 지표와 조직문화 자료를 활용해 인권침해 위험이 높은 기관을 사전에 파악하는 예방체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 역시 예방부터 피해자 보호와 회복까지 이어지는 전 주기 대응체계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 송유나 근로기준정책과장은 직장 내 괴롭힘을 제재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며 노사 공동의 조직문화 개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 조하진 간호정책과장은 간호사 인권침해를 개인 간 갈등이나 특정 직종 내부의 문제로만 봐서는 근본적인 개선이 어렵다며 적정한 근무여건과 교육, 현장 적응 지원, 조직문화, 상담·신고 및 피해자 보호체계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간협 "반복되는 비극의 고리 바꿔야"

신경림 간호협회 회장은 이날 인사말에서 인권침해 문제를 인력 부족과 교육 부족, 부적절한 대응체계가 결합된 구조적 문제로 진단했다.

2018년과 2023년 정부의 간호정책 대책을 통해 간호사 인권침해 방지와 교육전담간호사 배치, 병원 특성별 인력배치기준 강화, 야간간호관리료 도입 등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지만 현장의 어려움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신 회장은 과도한 업무와 담당 환자 수로 인한 소진, 감정노동과 스트레스, 충분한 교육 없이 현장에 투입되는 신규간호사, 보상 없이 이어지는 초과근무 등을 주요 문제로 꼽았다. 인력 부족과 부실한 교육, 미흡한 대응체계가 의료기관 내 인권침해를 반복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간호협회는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최소 간호인력 기준 마련 △신고 이후 피해자 보호 및 보복 방지 △조사·재발방지·사후관리 연계 △교육전담간호사 제도 확대 △신규간호사 교육기간 보장 △정기 실태조사 및 표준지표 마련 등을 정책과제로 제시했다.

 


김아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