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은 하나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의료진 개인의 과실을 중심으로 책임을 귀속해 온 기존 의료분쟁 논의 방식에 대해, 의료행위의 본질을 왜곡하고 의료문화를 경직시킨다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연구가 발표됐다. 의료사고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대신, 복합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중앙대학교병원 류마티스내과 최상태 교수와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강철 객원교수는 최근 한국의료윤리학회에 의료사고 책임 논의를 새로운 언어 구조로 재구성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제목은 '의료행위의 문법, 중동태: 중동태 정의와 포용적 의료문화로의 전환(The Grammar of Medical Practice and the Middle Voice: Toward Middle-Voice Justice and a More Inclusive Medical Culture)'이다.
연구진은 의료사고를 둘러싼 기존 책임 담론이 능동태와 피동태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의료행위의 복합성과 동적인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의료사고는 구조적·시스템적 문제보다는 특정 개인의 행위로 환원되고, 의료진 개인에게 과도한 책임이 집중돼 왔다는 분석이다.
논문에 따르면 의료행위는 의료진의 판단뿐 아니라 의료기기와 약물 특성, 인공지능(AI) 기반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 의료기관 운영 환경, 환자의 기저질환과 예측 불가능한 생물학적 반응 등 다수의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형성되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능동태 중심 서술은 이러한 복합 구조를 단일 행위자의 결과로 단순화해 왔다고 연구진은 짚었다.
예컨대 의료분쟁에서 흔히 사용되는 '의사가 환자를 수술했다'라는 표현은 사실관계를 설명하는 중립적 문장이지만, 의료사고가 발생하는 순간 해당 표현은 행위자의 자발성과 의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
그 결과 환자에게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면, 의사의 행위는 손해의 직접 원인으로 재구성되고, 의료사고의 책임 구조는 '의사의 행위 → 환자의 손해'라는 단선적 도식으로 고착된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구진은 '중동태(middle voice)' 개념을 제시했다. 중동태는 행위자가 결과를 '일으킨 주체'이면서 동시에 사건의 흐름 속에 '관여된 존재'로 위치하는 서술 방식으로, 인간 행위와 환경 요인이 비선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구조를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논문은 중동태적 서술이 의료사고를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하지 않고, 여러 내부·외부 요인이 얽혀 형성된 사건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약 C가 흔히 사용되는 치료제로 인식되는 의료 환경 속에서, 의사 B는 환자 A에게 해당 약을 처방하게 되었고, 그 결과 환자 A에게 중대한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중동태적 구조는 의사의 판단이 결과에 기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사건을 단일 행위자의 책임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연구진은 이러한 중동태적 접근이 의료사고를 '과실' 중심이 아닌 '관여와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윤리적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개인 처벌 중심의 책임 논의를 넘어, 의료 시스템 전반을 성찰하고 개선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확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최상태 교수는 "포용적인 의료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의료전문직과 법률전문직 모두가 중동태적 사건 구조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며 "법률가는 의료사고를 단일 행위자의 결과로 환원하기 전에 사건을 형성한 조건과 상호작용을 다층적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의료인 역시 과실 입증 여부에만 반응하는 방어적 책임에서 벗어나, 의료행위의 본질에 부합하는 전문직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연구진은 중동태적 책임 이해가 필수의료 기피, 방어적 진료, 의료인의 소진 문제를 완화하고, 의료사고 이후 환자와 의료진 간 신뢰 회복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연구는 문법 이론을 넘어 의료분쟁의 책임 방식과 의료문화의 방향을 재구성하려는 규범적·실천적 제안이라는 점에서 의료윤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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