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의협 "붕괴된 의료 정상화 위한 구조 개혁 시급"

의료 인력 추계 시스템 개혁, 전공의 복귀 및 수련 제도 혁신 등 정책 제시

"차기 정부는 의료계와 국민 신뢰를 회복하고 지속 가능한 의료시스템을 재건하기 위한 종합적이고 구조적인 정상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회장 주신구)가 지난 1년간 지속된 의료 위기의 본질을 '구조적 붕괴'로 규정하고, 의료정상화를 위한 정부와 정치권에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병의협은 9일 '대한민국 의료 복합 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 제안서'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의대 정원 확대, 수련제도 붕괴, 의대 교육 인프라 파탄 등 현 위기가 단순 갈등이 아닌 '비가역적 변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병의협은 "2024년 정부의 일방적인 정원 확대 정책 이후 9000명에 달하는 전공의 이탈과 의대생들의 휴학 사태가 이어지면서 수련과 교육 체계는 사실상 붕괴됐다"며 "2025년도 전공의 신규 지원자가 125명에 불과하고, 지원율은 전년 대비 2.2%로 급락한 현실은 위기의 심각성을 방증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병의협은 가장 먼저 의료정책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 의료인력 수급 추계 체계를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보건복지부 산하 '의료인력 수급 추계위원회'는 공급자 단체 참여 구조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정부 입맛에 따라 운영 가능하며, 최종 결정 권한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 있어 정치적 중립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위원회 실무 지원기관이 정부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으로 지정된 점도 신뢰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병의협은 ▲의료전문가가 과반 이상 참여하는 독립 기구 설립 ▲정책 결정권에서 정부 관료 및 비전문가는 자문에 한정 ▲법률을 통한 조직의 독립성 보장 ▲정부 출연금 의존 제한 및 자체 수익 모델 확보 등의 개선안을 제시했다.

또 면허 등록 현황, 전문과별 수요, 지역별 분포 등을 기반으로 AI와 빅데이터 분석을 활용한 과학적 수급 추계 시스템을 마련하고, 영국, 캐나다 등과 같은 장기 수요 예측 모델 도입도 함께 제안했다.

이와 함께 병의협은 수련 중단 전공의들의 복귀가 단순한 권고로는 이뤄지기 어렵다며 상황별 맞춤형 복귀 트랙 설계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복귀 대상 전공의를 ▲군 복무 여부 ▲수련 연차 ▲의료현장 경력 지속 여부에 따라 분류하고, 이수 경력 평가 후 연차 재조정, 보충 수련, 별도 정원 배정 등을 통해 공정하고 유연한 복귀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전역한 군복무자의 경우, 의무복무 중 수행한 의료 행위를 수련 경력으로 일부 인정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은 물론 대한의사협회 및 전문학회 중심의 리프레셔(재교육) 프로그램, 멘토링 시스템, 복귀 전형 등 제도적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아울러 병의협은 전공의 수련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기존 도제식 모델에서 탈피한 '프리랜서형 모듈 수련제도' 도입을 공식 제안했다.

이 제도는 전문과목별로 수련 과정을 세분화된 교육 모듈로 구성하고, 전공의가 다양한 병원에서 자유롭게 모듈을 이수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는 방식이다. 해당 제도는 이미 네덜란드, 캐나다, 독일 등에서 역량 중심 교육(CBME) 모델로 도입 중으로, 병의협에서는 수련의 유연성, 지역병원 참여 확대, 경력 단절 해소 등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병의협은 기초의학 교수 인력 부족 문제의 심각성도 제기했다.

병의협에 따르면 2025학년도 의대 신입생은 2023년 대비 1509명이 증가한 반면, 전국 기초의학교실 교수 수는 1638명에 불과하고, 이 중 5년 내 15%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어 교육 수용력 한계가 현실화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기초교원 인건비 및 연구비 지원 확대 ▲MD-PhD 통합과정 활성화 ▲임상의의 기초학문 진입 유도 ▲정원 증가 대비 교수 확보 미달 시 의대 정원 동결 또는 감축 등 강력한 관리방안이 필요하다는 것.

특히 병의협은 1년 이상 휴학 중인 의대생의 복귀를 유도하고, 교육 공백을 해소하기 위한 5개년 교육 정상화 로드맵 수립과 더불어 정부-의협 간 갈등 해소, 보충 수업 운영, 임상실습 탄력 편성, 국가고시 기회 재부여 등 유연한 해결 방안도 제시했다.

이 외에도 병의협은 공공의대 설립과 전남권 등 지방 의대 신설을 둘러싼 정치권 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공공의대는 선발 과정의 공정성 훼손 우려, 우수 교수진 확보 난항, 교육 인프라 부족 등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으며, 과거 서남의대 폐교 사례가 이를 방증했다는 이유다. 또한 지방 의대 출신의 70%가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현실에서, 지역 정주 강제를 통한 지역의료 강화는 실현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분석했다. 

병의협은 "의료 공백의 본질은 의사 수 부족이 아니라 열악한 근무 여건과 수가 체계에 있기 때문에 공공의료 인프라 확대와 근본적인 인센티브 개편이 먼저"라며 "단순한 공공의대 설립이나 지방의대 신설의 경우 정치적 명분에 치우친 비효율적 해법"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지금의 위기는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라, 전문가 의견을 무시한 정부의 일방적 의료통치 결과다. 정부와 의료계 간 신뢰 회복 없이는 어떤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며 "새 정부는 의료계와 협력해 헌법 가치와 전문성, 자율성이 조화되는 지속가능한 의료 시스템 재건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국민과 의료인 모두가 만족하는 지속 가능한 의료시스템 구축이야 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라며 "이를 위해 제안서의 정책들이 조속히 논의되고 실행에 옮겨지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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