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국내 첫 설치…1세기 역사 기록

[진단용 X-ray 변천사 上]

  
21세기 첨단의료기술에서 영상진단은 필수적 요소다. 의료영상 중 방사선을 이용한 검사로는 엑스선(X-ray)과 컴퓨터단층촬영(CT), 암에 대한 감별 진단을 위한 핵의학 검사인 양전자단층촬영(PET) 등이 있다.

이러한 의료용 방사선은 X-선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핵의학 검사에 사용되는 방사성동위원소가 일부를 차지한다.

X-선은 1895년 독일의 렌트겐에 의하여 발견됐으며, 파장이 매우 짧은 전자파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진단의 객관화가 필요해졌고, 방사선의학이 발전되면서 X선 촬영은 모든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검사가 됐다.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청은 병원에서 의료 방사선 사용증가에 따른 국민의 올바른 방사선 안전문화를 알리기 위한 일환으로 ‘렌트겐 주간(R⍥ntgen Week)’을 선포한 바 있다.

식약청은 의료 방사선의 사용에 대한 안전문화를 확산하고 국민들이 엑스선 검사를 안전하게 받을 수 있도록 렌트겐이 X-선을 발견한 날(1895년11월8일)을 기준으로 렌트겐 주간이라 정하고 1주일간 행사를 진행했다.

이는 의료 방사선의 사용에 대한 안전문화를 확산하고 지금까지 국민 건강과 영상의학 발전에 기여한 방사선에 대해 국민들의 안전의식을 높이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1911년 조선총독부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 엑스선광선실에 최초로 설치 운영된 이래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진단용 엑스선장치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해 보고 의료영상 기술의 최신 동향을 살펴본다.

최신형 의료장비 선호…경쟁적 도입
우리나라에 진단용 엑스선장치가 도입된 지 어느덧 100년.

국내 최초로 X-선 장치를 도입해 진료한 곳은 1911년 조선총독부의원이었다.

29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과에 치과진단용 X-선 장치가, 42년 조선결핵예방협회에 35mm 진단 간접 촬영장치가 각각 도입됐다.

66년 수도외과대학 부속병원에 혈관조영촬영기, 1969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병원에 구강용 파노라믹 장치가 각각 처음으로 사용됐다.

77년 경희의료원이 컴퓨터단층촬영 장치를 도입하면서 우리나라는 X-선 장치의 사용에 관한 한 후진국을 벗어나게 된다.

그 사이 72년 2288대의 진단용 X-선 장치는 84년 6172대, 96년 1월1일 기준으로 진단용 X-선 장치는 1만2161대, 컴퓨터단층촬영장치 800대, 치과용 장치 8611대, 파노라믹 장치 1135대가 등록됐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 중·대형병원들을 중심으로 고가 의료장비 수입이 대폭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신형 의료장비를 선호해 앞다퉈 경쟁적으로 도입하면서 수효 역시 적정수준을 넘었다고 관련업계는 말한다.

진단용 X-선 장치 변천사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진단용 X-선 장치를 제조해 사용해 왔다. 외국산 제품이 만연하던 초창기 X-선 장치는 일본이나 미국 군용기계가 대부분이며, 우리 기술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당시 X-선 장치 공업도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낙후돼 있어 한국전쟁 후 외국인들이 남긴 장치들을 수리하고 그들의 기술을 모방하면서 시장진입을 꾀하기 시작했다.

이후 현재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국산 기술로 만든 X-선 장치를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35개국에 수출하는 등 전량 수입에서 국산화가 이뤄지고 있다.

■시장 진입기(50년대)
국내에서 X-선 장치 제작을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8년으로 고려X-선기계(대표 박양규)의 30mA 용량의 촬영과 투시가 가능한 검색 장치었다.

이때 장치는 미군용 장치를 수리 조립한 것으로 30mA, 15mA 용량이 주종을 이뤘다. 고정양극식 튜브를 사용한 필라멘트 체크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성신 X-레이공업사(대표 이성철)에서도 같은 기종의 X-선 장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들어와 X-선 장치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제조업체도 늘고, 부품 전문생산 업체도 생겨났다.

■성장기(60년대)
1960년대에는 중앙(대표 한원국), 서울(대표 최영수), 수도(대표 양윤형), 한일(대표 한순식), 동양(대표 박동식), 동신(대표 은달동), 극동(대표 김기태), 동아(대표 문명화), 신신 등이 있었다.

고압트랜스를 제작하는 업체로는 동인(대표 김정금)을 비롯해 한성전자의료기(김봉세), 중앙(대표 이양구, 박병인)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장치의 용량이 점차로 커져 200~300mA 정도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자기정류에서 단상전과정류로 전환됐으며, 태엽식 타이머에서 전자식 타이머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이 당시다.

68년에는 최초로 회전양극식 X-선관을 선보였다. 67년 한·일 국교정상회 회담이후 일본산 기계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수입물량은 연간 20~30대 정도다.

■혼미기(70년대)
70년대에는 방사선 장치 제조사에게 혼란만을 안겨준 시기로 혼미기라고 한다. 1971년 보사부는 무허가업체들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72년에는 업체들의 통합이 이뤄졌다. 극동, 중앙, 성신, 경일, 동아만 남고 모두 폐쇄되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무허가업체 정비는 수업업체의 활성화를 가져왔고, 외국산 기계에 대한 금융지원 혜택까지 주어져 외국산 기계가 범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79년 10월 제품의 품질 및 성능관리를 국가 관리체계로 전환하면서 동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회사가 폐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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