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장준하 선생 반신불수 매도”

‘사상계’, “본인 의술 선전하면서 장 선생 이용… 유족들 명예훼손 사죄 요구”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와 건강에 대해 일부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침사 김남수옹의 주장이 사실 확인 결과 터무니없이 왜곡된 것으로 밝혀졌다.

장준하 선생의 ‘정수(精粹)’인 ‘사상계’는 최근 “일생을 독립운동을 위해 광복군에 투신하고,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에 방해가 되는 주장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침사 김남수옹은 고 장준하 선생과 유족들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상계에 따르면 “최근 침사 김남수옹은 서울신문, 문화일보, 평택시민신문 등과 가진 인터뷰에서 ‘고 장준하 선생이 디스크를 심하게 앓고 있었고, 지팡이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절대 집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고 주장해 보도됐다”고 밝혔다.

아울러 “본인이 여러 차례 제기동 홍파초등학교 앞의 장준하 선생 자택을 방문해 디스크 치료를 했다”고 밝힌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침사 김남수옹은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장준하의문사진상규명 조사에서도 이 같은 내용을 주장한 것으로 2004년 11월 20일 문화일보 사회면 기사에 보도된 바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사상계가 “일부 언론에 보도된 침사 김남수옹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취재 및 유족들을 통해 확인한 결과, 고 장준하 선생은 협심증으로 고생해 주치의인 조광현내과의 조광현 원장에게 치료받기는 했으나 허리 디스크를 앓은 적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고 장 선생은 평소 지인들과 등산을 즐겨했고, 중국에서 6000리 장정을 한 장 선생이 평생 허리가 아픈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와 함께 침사 김남수옹이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75년경 동대문구 제기동 홍파초등학교 앞 자택을 방문해 치료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유족 측의 말을 인용, “제기동에서는 60년대 중반에 사셨고 그 후 여러 번 이사를 해 돌아가실 때는 자택이 상봉동에 있었다”고 밝혔다.

유족 측은 또 “고 장준하 선생이 75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셨고, 유족들은 민주화 이후 선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진상의 규명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상황에서 선생을 반신불수로 매도하고, 진상규명 활동에 방해를 한 침사 김남수옹의 행동은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할 따름이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사상계는 결론적으로 “최근 한의학계와 침·뜸 문제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침사 김남수옹의 이런 행동은 신문, 방송 등 언론을 통해 본인의 의술을 선전하는데 고 장준하 선생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서 “침사 김남수옹은 언론을 통해 밝힌 고 장준하 선생과 관련한 발언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 확인을 해야 할 것이며, 거짓으로 판명이 난다면 고 장준하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해 사죄해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한편 사상계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할 기회를 주기 위해 김옹에게 여러 차례 전화했으나 현재까지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

[문제가 되고 있는 김남수옹의 침·뜸강좌 내용]

※ 이 글은 김남수옹이 2008년 4월 28일 ‘여의도통신’에 연재한 ‘김남수의 침·뜸강좌/디스크, 그 치명적 고통에서 벗어나기(2)’ 원본 그대로의 내용이다.

장준하 선생은 산에 갈 수 없는 몸
디스크 심해서 제대로 운신도 못해

“나를 찾았던 많고 많은 디스크 환자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사람으로 장준하 선생이 있다. 장 선생을 따르는 이의 소개로 왕진을 갔을 때 장 선생은 거동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꼼짝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장 선생은 말 그대로 방안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디스크가 너무나 심해 일어나 앉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말도 크게 못하고 기침도 못하고 웃지도 못했다.
장준하 선생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자택이 제기동 홍파초등학교 앞에 있었는데 지붕 위로 바로 고압 전류선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가난한 장 선생 아니면 살려고 드는 사람이 없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나마도 사글세였다. 아무튼 나한테 침․뜸 치료를 받고 장준하 선생은 비교적 빠르게 좋아졌다. 통증도 많이 없어졌고 지팡이에 의지해서이긴 하지만 방에서 마루를 천천히 왔다 갔다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집 밖에 나가 활동할 수 있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한 보름 지났을까, 신문을 보다 장준하 선생이 산에서 실족사 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납득할 수 없음을 넘어 기가 막혔다. 혼자 산행을 갔다가 발을 헛디딘 것이 사망의 원인이라는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디스크가 심해 지팡이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집밖에 나갈 수도 없으며 낮은 계단도 제대로 오르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수로 울퉁불퉁한 산비탈을 혼자 오른단 말인가! 산에 갈 수가 없는 양반인데 왜 산에 가서 실족을 했을까.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장 선생을 치료한 이는 아마 나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심한 디스크 환자였던 장 선생은 혼자서 산행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장 선생이 혼자 산에 갔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노의근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카카오톡
  • 네이버
  • 페이스북
  • 트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