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의대증원 정책에 마음 상한 의료잠룡들

[보건포럼] 서정선 분당서울대병원 연구석좌교수

▲서정선 분당서울대병원 연구석좌교수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증원 정책이 100일도 안되어 의료대란으로 번지고 있다. 처음에는 총선이 끝나면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적극적으로 나올 것이고 결국 어떤식으로든 타협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지금 예상이 빗나가고 있다. 정부가 문제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의료붕괴로 이어질 것이 눈앞에 보이는데 정부는 결과의 모양새에 집착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직도 의료 공급체계의 복잡성을 모르는 것일까. 오류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무능하여 해결시한을 모르는 것일까.

이번 의정갈등의 본질은 신의가 무너진 어이없는 무리한 증원이다. 어이없음이란 정부가 문제를 미숙하게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공의들이 느낀 감정일 것이다. 사람들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미래가 예측될 때뿐이다. 이미 닦여진 길따라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나가던 전공의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권력이 개입하여 제도를 바꿔버리니 미래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권력이 복잡한 난제를 단순함과 힘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에 어이없음과 배신감이 밀려 왔을 것이다. 결과는 투쟁이 아닌 사직이었다.

주역의 첫 번째 괘는 건괘이다. 6개의 양효로 된 건괘는 물속에 있는 잠룡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밖으로 나온 현룡이 하늘을 날기위한 시도를 통해 마침내 비룡으로 변신한다. 다섯 번째효에서 비룡은 자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우주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리고 마지막여섯번째 효에서는 전성기가 지나서도 높이 오른 항용은 이제 후회속에서 마감한다. 건괘가 주는 교훈은 '모든일에는 때가 있다' 라는 것이다

의과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의학에 입문한 의대 진입생들과, 졸업후 다시 분야별 전문지식을 찾아 나선 전공의들은 한국 의료의 미래잠룡들이다. 이번 사건은 의료잠룡들이 어처구니없는 권력과 만남에서 마음을 크게 상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 일의 결말이 의료붕괴라는 비극으로 끝날지 아니면 극적인 반전으로 차악의 결말을 보게될 지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를 조망해본다면 이런 종류의 변화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가 개혁에 나서고 외부의 잘못된 시도에 맞서야 할 것이다.

나는 지난 10년동안 모교진입생들에게 태블릿과 노트북을 기증해왔다. 올 3월초에도 동맹휴학중인 본과 1년생들에게 노트북을 주었다. 기증하면서 내가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의학이 바뀌고 있다. 증거중심의 의학에서 데이터중심 의학으로 바뀐 것이다. 인공지능과 예측위주의 정밀의학 시대가 오고 있다. AI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의학을 준비하라. 이 노트북으로 자신의 지놈도 분석해보고 의대수업에서 외우는 방식에서 벗어나 데이터처리 방식으로 서서히 전환하라'

외부 권력의 어설픈 개혁시도는 한국의료의 큰상처를 주었으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부로부터의 개혁이다. 모든 분야가 디지털로 전환되는데 보건의료라고 예외가 될수없다. 우리에게는 미래 환경에 맞는 새로운 의료질서가 필요하다. 영국 철학자 A.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우주의 변하지 않는 두축인 질서와 변화사이에서 '새로움을 향해 나가는 질서(Order entering upon novelty)가 의료잠룡들이 만들어내야 할 대한민국 미래의료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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