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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의약전문지 ‘중외의약신보’발행

이병구 기자 / 2001.07.16 00:00:00

유세환, 국내 최초 약국 인수당 설립
1900년대초 약국.의사단체 속속 결성

우리나라 최초의 약국은 한말 약제관이었던 유세환의 인수당 약방이었다. 유세환은 한일합방으로 관직을 잃자 종로 3가에 약방을 차렸다.
인수당약방에 이어 공애당 제생당 보혜당 자선당 천일약방 홍제당 천은당 모범매약상회 한성약관 등이 잇따라 생겨났다. 이들은 모두 종로에 위치해 있었다. 종로 약국거리의 명성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육당 선친 장진계 대표로

당시의 약국은 매약제조업을 겸한 곳이 대부분 이었으며 한국인으로 의약품 판매를 전업한 곳은 종로 3가 박애당약방과 교남동의 활명당약방이 있었다. 이들 약업자 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계를 만들었는데 바로 장진계 였다.
계의 대표는 육당 최남선의 선친인 최헌규가 맡았다. 최헌규는 지금의 을지로인 구리개의 한약업자 였다. 최헌규의 육남매 중 둘째 아들이 바로 최남선이다.
최헌규는 최영장군의 후손으로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중인정도의 신분을 유지했다. 관상감의 참사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한약방을 경영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조선 왕실보다 더 많은 현금을 굴릴 수 있을 정도였다.
1908년 약업자들은 약업총합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회원들의 대부분은 장진계 회원들이었을 만큼 장진계는 우리나라 약업단체를 설립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약업총합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약업단체이며 양약 취급을 위한 1년 과정의 조선약학 강습소 였다.
약업총합소의 초대소장은 최한조가 맡았다. 부소장은 유한필이며 이들은 업권 신장을 목적으로 조직을 꾸렸다. 2대 소장은 이석모가 맡았으며 그는 회원의 단합은 물론 약업단체의 면모를 갖추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석모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제약 법인체인 조선매약주식회사를 창립한 장본인 이었다. 그는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일본 여자를 부인으로 둘 정도로 신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당시 구리개는 한약방과 한약건재상들이 많았는데 회원 중에는 가내 수공업 형태지만 매약을 제조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 한약방들은 한약재를 이용, 소아용약, 보약을 다량으로 제조해 판매 했다. 그러나 한일합방으로 한국인의 매약활동은 크게 위축되고 의약품의 판매업에 대한 인허가 절차도 모두 일본인의 지휘아래 넘어가게 됐다.

약업총합소 탄생

구리개 약업자들이 활약하기 이전 1905년에는 약업사에 의미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름아닌 첫 의약전문 신문이 탄생한 것이다.
중외의약신보 였던 이 전문지는 의사인 장기무씨가 발행 등록을 했다. 장기무는 후에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학술단체인 의사연구회의 간사로 활동한 인물이다. 1908년 11월 15일 창립된 의사연구회는 관립학교의 교관들과 졸업생들이 주도로 만들었다.
어쨋든 이 신문은 장기무가 신문을 만들어낼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화평당약방 주인인 이응선씨가 경영을 인수했다.
이응선은 조선매약 창립 6년 째인 1919년 경영위기에 빠진 중외제약신보 발행인 이석모의 주식 절반이상을 사들였다. 그는 후에 조선매약 제 2대 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참고로 이응선이 인수한 조선매약은 화평당약방의 자매회사로 승승장구 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당시 유행했던 이 회사의 영신환은 시간이 지나면 곰팡이가 피고 딱딱해지는 경쟁업체의 제품과는 달리 설탕과 한천( 寒天)을 이용해 이를 극복했으며 이같은 장점으로 전국은 물론 만주에까지 수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응선이 발행해

평소 장기무와 잘 알고 있던 사이였던 이응선은 화평당의 광고를 독점하는 조건으로 일체의 자금지원을 약속했다.
경영권을 인수한 이응선은 한동안 장기무에게 발행 편집 업무를 일임 하기도 했다. 타블로이드 4면 월간으로 나온 이 신문은 광고면은 전부 화평당이 독점했으나 기사는 공정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평소에는 4면 발행이 원칙이었으나 이슈가 있거나 의약업자에게 전달할 꼭 필요한 정책이나 계몽할 내용이 있으면 8면으로 증간하기도 했다.
구독료는 무료였다. 현재 의약계 전문지들 가운데 일부가 무료로 배포되는 것은 이같은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신문은 그후 이응선이 발행인으로 등록했으며 나중에 조선매약 광고문안자였던 최찬식으로 발행인이 바뀌었다. 본관이 경주이며 호가 해동초인, 동초인 최찬식은 1912년 ‘추월색’(秋月色)이라는 책을 쓴 일제시대의 유명한 소설가이다. 한성중학을 졸업한 후 1907년 문학에 뜻을 두고 중국의 소설집 ‘설부총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국적 정치단체로 악명을 떨쳤던 일진회의 총무원 최영년의 아들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신소설 ‘혈의 누’의 작가 이인직의 뒤를 이어 한일합방을 전후로 대표적인 친일작가로 오점을 남겼다. 독실한 불교신자 였으며 잡지 ‘신문계’ ‘반도시론’의 기자를 지내기도 했다. 6.25로 고초를 겪다 51년 1월10일 사망했다.

무가지 전통 이어져

중외의약신보외에도 잡지 등의 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이 시기에 발간된 잡지는 모두 45종이었다.
1911년 창간된 ‘조선의학잡지’를 필두로 1914년 ‘의학원보’ 1916년 ‘동아의학보’, 1918년 ‘조선의학계’가 잇따라 창간됐다. 이들 신문 잡지 들은 대개 선전용으로 매약본포나 건재약국에서 경영하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거래조건이나 가격을 알리는 내용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의약계에 관한 소식도 폭넓게 다뤄 국민보건 향상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한말을 전후해 서울의 효경다리 근처의 조고약 집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효경다리는 지금의 중구 주교동과 예지동 사이에 있었던 다리로 영풍교 효경교 효교 효경다리 새경다리 소경다리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씨가 만든 고약(膏藥, 피부 또는 점막에 붙여 점막의 염증 궤양 상처 종기를 비롯해 피부를 통한 약물의 흡수나 육아의 발생을 촉진하는 피부 외용제. 일반적으로 부은 것을 삭이고 아픔을 멎게 하며 고름을 빼내 새살이 돋게 한다.)
조고약은 외과의사로 외상환자만을 전문으로 치료했던 경험을 살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비약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조고약의 명성은 대단해 시골에서도 찾아올 만큼 조근창이 운영하던 의원은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했다.
1913년 됴고약으로 이름을 짓고 자신이 운영하던 천일약방을 통해 전국의 환자들에게 판매를 시작했다. 천일약방은 금새 유명세를 탔으며 2대 사장인 조근창의 아들 조인섭은 ‘하늘아래 하나밖에 없다’는 됴고약으로 전국을 떠덜썩 하게 했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조인섭은 당시 당재로 중국인이 주름잡던 한약재 시장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업소로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한국인이 한약무역에 뛰어든 것은 조인섭과 순창약방의 박기승 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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