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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체트병

  • 고유번호 : 571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1 10:22:08

앞 못보는 불행
보지 못하는 것 만큼 슬픈 것은 없다. 몸이 천량이면 눈은 구백량이라 한 것은 보는 것에 대한 비중이 얼마나 큰 가를 말해준다. 권태현씨(48). 그는 앞을 전혀 볼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다. 한 가족의 가장이며 자상한 남편이며 아빠였던 김씨는 어느날 찾아온 포도막염이 시각장애로 발전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눈에서 파리같은 것이 날아 다니는 기분이었어요. 어떤 때는 괜찮고 어느 순간에는 그 정도가 심했지요. 안과에서는 포도막염이라고 해요. 안약을 넣고 항생제 등을 먹었지만 별로 차도가 없었어요.』 권씨는 20여년 전의 그때를 떠올리며 말문을 열었다.그 무렵  입과 성기쪽에 발진이 생겨났다. 그는 단순히 몸이 피곤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해가 바뀌어도 증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의 표현에 따르면 전국병원 순례가 시작됐다. 도대체 무슨 병인지 병명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수 없었다. 『포도막염이니 결막염이니 하는 진단밖에는 다른 말이 없어요. 그러는 사이 눈은 더 나빠지고요.』 눈을 부릅떠도 겨우 1미터 앞에 있는 사물을 보기 어렵더니 어느날 아침 눈을 떴는데 온통 세상이 까맣게 보였다. 권씨는 그 때를 절망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지 불과 5년만에 실명에 이른 것이다.
권씨는 이때부터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수 없었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금실이 좋던 아내와도 헤어졌다. 입과 성기쪽의 통증도 심해져 갔다. 권씨는 면도칼로 생살을 찢어도 이처럼 아프지는 않을 것이라고 미간을 찡그렸다. 밥은 커녕 물 한모금도 넘기기 힘들었다. 자살을 결심했다. 그렇지만 모진게 생명이라고 했던가.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를 되풀이 했다. 그래서 살아보기로 했다. 고3인 아들과 고1인 딸애가 불쌍하다는 생각, 그리고 아빠로서의 책임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악착같이 병과 싸우고 자식들을 위해 남은 삶은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저보다도 누님이 더 고생하셨어요. 지금 내가 이렇게 있는 것은 다 누님 덕분이예요.』 옆에서 지켜보던 권정수씨는 자신 얘기가 나오자 쑥스러운 듯 당사자보다 더 괴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동생의 손발이 되고 있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 했다.
그는 세상을 보는 것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한 번만이라도 세상을 보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일년내내 피부병


부산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김지태씨(49). 처음에 입병이 났다. 입이 헐고 아랫쪽에도 궤양같은 것이 생겼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동네 약국에서 약을 지어먹고 좀 나으면 괜찮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약한 피부의 궤양이 일년내내 끊이질 않았다. 편도선도 부어왔다.
『그전에요. 물론 건강했지요. 현역을 무사히 마쳤을 정도니까요.』 궤양이 심해지면서 눈에 눈꼽이 끼는 증상이 나타났다. 간혹 눈을 심하게 비비면 없어지고 다시 눈꼽끼는 증세가 되풀이 됐다. 그러더니 횟수와 간격이 짧아지고 보는 것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만 4년만에 실명했다고 힘없이 말했다. 의사는 포도막염에서 녹내장으로 다시 녹내장 합병증이 실명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실명후에도 대동맥이식술을 받아야 했다. 어느날 인가 배를 만져보니 심장의 박동보다 더 크게 배가 출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질병이 혈관을 타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병명도 모른채 실명하고 대수술까지 받았던 그는 6년전에야 겨우 자신이 베체트병환자라는 것을 알았다. 77년 결혼한 그는 부인의 간호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윤옥자씨(45)는 떠나서 다른 삶을 살라고 강요하는 남편을 떠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랜 병간호로 지친 얼굴이었지만 윤씨는 인연과 사랑 때문에 남편과 남은 일생도 함께 보낼 것이라고 희미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런 아내에게 그는 여행을 가자고 투정 부리는 것이 못내 미안할 따름이다. 비록 볼수는 없어도 파도가 치는 바다와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내가 들려주는 주변 경치를 상상하는 것이 큰 낙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건강해지면 아내를 위해 정말 뭐든지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윤씨는 자식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자기 앞에서 세상을 뜨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건강했던 자신에게 몹쓸병이 온 것을 부산 바닷바람과 고생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현재 안성맹인복지회 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북 군산에서 여관업을 하는  박정임씨(가명.58). 박씨는 관절염과 당뇨병 치료를 받던중 베체트병 진단을 받았다.
박씨도 다른 베체트병 환자와 같은 눈의 이상, 구강점막에 나타나는 궤양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원인도 없고 치료방법도 없는 질병과 싸우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하소연했다. 건강해지고 싶다는 소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박씨는 소파수술이 잘못돼 수혈을 받는 과정에서 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윤씨는 딸도 입안이 헐고 무릎관절에도 이상이 있어 유전된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감당키 어려운 고통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차정희씨(43). 자신도 감당키 어려운 병마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아픈사람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는 성경책을 항상 갖고 다닌다. 『작은애 낳고 수혈받는 과정에서 병에 걸렸어요. 한 2년간은 심한 두드러기로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지금은 두드러기는 없어졌지만 대신 입안과 아랫쪽이 허는등 전형적인 베체트 증세를 보이고 있다.
『아프다고 누워 있으면 더 피곤한 것 같아요. 그래서 세탁소일을 쉬지 않고 해요. 일하면 잡념도 사라지고 하루도 빨리 지나가잖아요.』 그는 고치기 힘든 난치병에 걸린 자신을 학대하기 보다는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으로 병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한때 자신에게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킨 시누이들도 용서하기로 했다. 요즘은 남편과 아들이 설거지를 해주고 집안청소등을 도와주고 있어 그렇게 힘든 줄 모른다는 그는 목에 건 십자가를 어루만지며 용서하고 이해하면 모든게 편하다고 환자 답지 않게 넉넉한 여유를 보여주기도 했다.
베체트병은 1937년 터키 피부과 의사 베체트가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한후 세상에 알려졌다. 실크로드를 따라 한국 일본 중국 및 지중해 연안국가에서 높은 발생빈도를 보이는 지역적 특수성이 있는 특이질환. 반복되는 구강, 외음부궤양, 포도막염이나 홍채염 등에 의한 시력감퇴와 실명, 피부가 잘 곪으며 상처가 낫지 않고 관절통과 근육통이 있다. 재발이 심하며 오심, 구토, 복통, 복부팽만이 나타나고 중추신경계나 심장 혈관에 병이 올수 있다.
이같은 증상은 단계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나타나며 심하면 사망에 이른다. 체계적인 베체트병 연구로 유명한 연세대세브란스병원 피부과 방동식 교수는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아 완치되는 치료법은 없다고 말했다. 바이러스나 세균감염 또는 유전적 인자와 면역학적 이상으로 추측하고 있다는 것. 그는 휴화산과 같이 평상시 조용하다가 활화산으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것이 바로 베체트병이라며 환자는 늘 휴화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상의 치료법이라고 설명했다. 또 장기간에 걸친 약물치료와 지속적인 통원 및 정기검사가 악화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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