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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리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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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1 10:47:16

근육통, 만성신부전, 심혈관 이상


온가족에 덮친 불행
불행은 겹쳐서 오는가.
전남 곡성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사는 김정기씨(38)는 간혹 이런 상념에 잠긴다. 배운것도 가진 것도 없다. 건강도 말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 마저 중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큰형은 오래전에 사망했고 막내는 30이 넘어도 아직 장가를 가지 못했다. 3명의 여동생 역시 제 몸 하나 간수하기 어렵다.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일어난 정기씨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목련, 개나리, 벚꽃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마당의 한구석에 기대 앉았다.
봄볕이 무척 따사롭다. 그는 살갗을 기분좋게 자극하는 봄날의 햇볕을 앞으로 몇번이나 더 쪼일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심란하다. 최근들어 몸이 급속히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신장이식의 후유증인지 기운이 하나도 없어 한발자국 움직이는 것이 여간 곤욕스런 것이 아니다. 70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안쓰럽다. 평생 땅만 파다가 즐거운 일 한 번 보지 못하고 늙으막에도 자식의 병 수발을 들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하다. 막 농사일이 시작되는 시골이라 아버지는 오늘도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셨다.
정기씨는 그런 아버지를 보는 것이 안쓰럽다. 그렇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에게는 단돈 만원을 벌만한 생활능력이 전혀 없다. 한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약을 타먹는 것도 아버지 신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 가족 건사도 못하고 아버지에 의지하는 것이 죽기 보다 싫다.
물론 정기씨 책임만은 아니다. 이렇게 된 것도 다 살아보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기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찍 서울로 올라왔다. 돈을 벌어 금의환향 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서울생활은 시작 부터가 잘못됐다.
봉제공장, 피혁공장등에서 닥치는대로 일을 했지만 월급 한 번 제대로 받기 힘들었다. 사장은 회사가 어렵다, 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로 쥐꼬리만한 돈으로 정기씨를 회유했다. 정기씨는 내가 열심히 일하면 회사가 잘돼 돈을 많이 받을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남보다 배이상 열심히 일했다. 잔업, 특근, 야간근무를 밥먹듯이 했다. 어떤 때는 휴일도 반납했다.


병마가 앗아간 소박한 희망
억척스럽게 일해 조금씩 돈이 모아졌다. 시골에 돈도 부쳤다. 좀더 모아지면 소도 사고 논도 사서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정기씨의 이런 소박 ?희망은 병마 앞에 일순 사라졌다. 어느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크게 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었다. 평소와 같이 근무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도 좀처럼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
결국 정기씨는 작업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돈을 벌어 가기는 커녕  병자의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주예수병원에서 아버지를 맞았다. 아버지는 “얼마나 얼굴이 부었는지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고 그때 일을 기억해 냈다. “말도 못했지라 얼마나 상혔는지 내자식이 아닌갑다 생각이 들정도 였응께.” 아버지는 돈 벌러간 자식이 산송장이 돼서 돌아오자 그날 내내 목놓아 울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가서 돈 많이 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자랑스런 둘째가 이지경이 된 것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병이 중했으면 집으로 찾아오지도 못하고 바로 병원에 입원 했을까 생각하니 설움이 복받쳤다. 병원에서는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 집에서 편히 쉬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치료할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앞이 깜깜했다.
어떻게든 자식을 살리고 싶었다. 전북대병원을 갔다. 그곳에서 신장이식을 받으면 생존할수 있다는 말을 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콩팥을 자식에게 이식했다. 10시간만에 깨어났다.
“나 아픈 것은 둘째지라 아가 괜찮은가 그것이 걱정이제.”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렇지만 직장을 가질 만큼 건강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수술후에도 건강 악화
시간이 지나면서 수술 후유증인지 상태가 악화됐다. 매일 먹는 약 부작용일 수도 있었다. 정기씨는 자신에게 남은 생명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망이 있다면 어머니의 건강이 회복되는 것이다. 자신이야 어쩔수 없지만 어머니라도 건강해서 아버지 하루 세끼 밥해 드렸으면 하는 바람을 지울수 없다.
정기씨는 온가족에게 닥친 저주와 같은 불행을 극복할수 있는 방법은 이세상에 없다며 흐느꼈다.
임봉철씨(36)도 콩팥이식 수술을 받았다. 평소 이렇다할 건강상의 이상은 없었으나 2년전 부터 기운이 없고 어지럼증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도가 심해졌다.
다니던 직장도 잠시 쉬고 병원을 찾았다. 강남성모병원에서 파브리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약을 먹었다. 그러나 차도가 없었다.
담당의사는 콩팥이식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서울중앙병원에서 둘째 여동 萱?신장을 이식 받았다.
결혼해서 아이가 둘인 여동생은 오빠를 위해 흔쾌히 자신의 장기를 내놓았다. 평소 말이 없고 의사 표현을 잘 하지 않던 오빠도 이때만은 고마움을 표시했다.


관리 잘하면 일상생활 가능
수술의 결과는 좋아 현재 큰 불편없이 직장을 다니고 있다. 건강관리만 잘 하면 의사는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파브리(Fabry)병은 a-galacto-sidase의 효소부족으로 인해 신체의 여러장기 특히 신장, 신경, 심장의 혈관 등에 이상이 나타난다.
성염색체 열성유전이며 3분의 1은 돌연변이, 3분의2는 모계로 부터 유전된다. 서서히 진행되며 40∼50대 까지 살 수 있다. 간혹 70세까지 살기도 한다.
고열, 근육통, 사지통, 관절통, 피부의 감각이상, 미만성 구간혈관 각화증, 각막혼탁이 오는 학동기 및 청소년기와 혈뇨, 단백뇨,신세뇨관성 산증등 신장증상이 오는 시기와 만성신부전, 심장 및 뇌혈관 이상 시기등 3단계로 구분된다.
사망원인은 대개 신장 및 심장의 합병증이다. 1898년 독일의 파브리와 영국의 앤더슨이 처음 학계에 보고했다.
서울중앙병원 소아과 유한욱 교수는 “4만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이 병의 진단은 임상증상 혹은 전자현미경 검사시 층판 구조를 보이는 특징적인 얼룩말 무늬와 세포질내의 봉입체등 조직검사로 알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변이나 혈장, 백혈구 및 조직내의 a-galactosidase A의 활성도 감소를 증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는 것.
유 교수는 “현재 완치할수 있는 치료법은 없으나 미국 젠자임사의 효소제가 임상중에 있어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데 전망은 매우 밝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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