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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의 힘

  • 고유번호 : 749
  • 작성자 : 최원자
  • 작성일 : 2007-02-12 07:12:22
여백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은 아주 사소한 뜻밖의 곳에서 다가오곤 한다. 출근길 의대 캠
퍼스내의 ‘지석영로’의 투명한 연두빛 나뭇잎에 새삼스럽게 감탄하고, 퇴근길 은은한 아
카시아꽃 향기에 흠칫 묵혀둔 감성이 되살아난다. ‘아! 봄이구나’ 싶었는데 어느새 만물
이 무성하게 성장하는 여름이 내달리는 소리가 슬쩍 느껴진다.  녹음이 나날이 울창해지고
세상 모든 사람들과 사물 가운데 생명의 물기가 차오르는 것이다. 이렇듯 절기는 우리 곁을
어김없이 찾아와 또 새로운 봄, 다시 새로운 여름이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빠르기가 쏜살과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즈음 강산이 몇번 변했을,
간호사로서의 시간을 되돌이켜 본다. 간호사로서 지나온 시간의 정점에 서서 ‘간호사로서
스스로를 지켜왔던 힘들은 어디로부터 나왔던 걸까?’ ‘열정적이고 통찰력 있는 삶을 충만
하고 일관되게 살아내 왔는지’ 묻고 싶은 지금은 계절의 순환만큼이나 삶에 대한 부채감과
의욕이 동시에 북돋아지는 계절이다. 
간호사로서 스스로를 지켜주었던 힘을 돌이켜 보면 첫째로, 아주 가까이서 가장 많은 시간
을 같이 보내왔던 환자와 그 가족들이었던 듯 싶다. 삶의 경계선 상에서 병마와 싸우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살아있어 주어서 고맙다’고 속삭이며
서로의 굽은 어깨를 보다듬어 주는 사람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도 ‘삶 속엔 절망을
이겨낼 힘이 있다’고 답하며 고단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처음 간호현
장에 임하며 가졌던 초발심(初發心)을 늘 항상심(恒常心)으로 유지하게 해주었던 이들이다.
간호사의 힘 그 두 번째는 아마도 간호사라는 직업자체가 요구하는 정신적 에너지 덕분인
것 같다. 간호사만큼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관용(寬容, 똘레랑스)’이라는 정신문화에
익숙하고 또 부단하게 훈련되는 세계가 또 있을까 싶다. 돌봄이 필요한 환자를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간호하며, 상대방 중심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미덕을 가꾸고 정련해야 하니까 말이
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한 나를 타인을 보다 더 이해하게 만들었고 남의 입장에
서 생각할 줄 알게 만들어 주었고 나 자신을 누르고 세상에는 내 생각하고는 정말 다른 많
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간호사라는 직업에 감사한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인생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간호사로서 힘의 원천 또 한가지는 삶의 구체적인 일상 사이에서 문
득 문득 발견하는 작고 소박한 기쁨들 때문이다. 
늦봄 서늘한 밤공기따라 퍼지는 꽃그늘 냄새, 칠흑같이 깜깜한 하늘에서 다시 열리는 별들
의 세계, 울창한 나무아래 옹기종기 앉아 있는 건물들의 나즈막한 활기, 여유로운 일요일 오
전 창가로 내리쬐는 노오란 햇살과 한가로운 신문 한 묶음, 처마끝을 때리는 초여름 빗줄기,
오래 좋아하여 길들여진 음악이 주는 감흥, 영화속 자신의 삶을 놓으려 한 노인이 맡은 체
리향기(까지도)….
이 모든 사소함이 새삼 삶의 의지로 다가오는 요즈음이다.
최원자 <서울대병원 소아간호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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