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의료현장에서 의약품 공급 불안정이 반복되면서 국회와 정부가 대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의된 '수급불안정 의약품 성분명처방 강제 법안'과 '대체조제 활성화 약사법 개정안'은 의료계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4일 브리핑을 열고 두 법안 모두 환자 안전을 위한다는 취지와 달리 현장에서는 심각한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법안들이 환자 안전과 진료의 본질을 외면한 채 의사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것. 이에 국가 책임 하의 안정적 공급망 구축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급 불안정 의약품, 반복되는 위기
지난해 에토미데이트가 마약류로 분류된 이후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전신마취를 요하는 응급 수술 현장은 큰 혼란에 직면했다. 최근에는 불안장애 환자 치료에 필수적인 아티반(로라제팜)의 공급 중단 위기까지 겹쳤다. 의협은 즉각 식품의약품안전처에 공문을 보내 대책을 요구했고, 식약처가 대체 공급 방안을 제시하면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의협은 "환자 치료 공백을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라고 평가하면서도 "이 같은 일회성 대응으로는 반복되는 위기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며 :앞으로도 공급 상황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며 환자 피해 방지를 위해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국회 일각에서 발의된 '성분명처방 강제 법안'은 의협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수급불안정 의약품의 문제는 제약회사의 생산 중단이나 수입 중단에서 비롯되며, 가격·시장성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이를 두고 의협은 "이는 본질적으로 국가의 공급 관리 책임"이라며, "성분명처방을 강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이번 법안에는 성분명처방을 하지 않은 의사에게 최고 징역 5년까지 처벌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이는 형법상 과실치상죄(3년 이하 징역)보다도 높은 형량이다. 의협은 "의학적 판단을 근거로 처방하는 의사를 중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조항"이라고 비판했다.
대체조제, 환자 알 권리 보장이 핵심
또 다른 쟁점은 약사법 개정안이다. 현행법은 대체조제를 시행할 경우 의사의 사전 동의를 원칙으로 하고, 불가피할 때는 3일 이내 사후 통보와 환자 즉시 통보를 의무화한다. 이를 어길 경우 징역 1년 이하 또는 벌금 1천만 원 이하의 처벌 규정도 두고 있다.
하지만 개정안은 심평원 시스템을 통한 간접 통보를 허용해 처방한 의사의 알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의협은 "이 경우 대체조제가 무분별하게 확산될 위험이 크다"며 "환자 알 권리와 의사 동의 절차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환자에게 단순히 통보하는 수준이 아니라, 반드시 동의를 거치는 절차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의협은 '불법대체조제 피해신고센터'를 개소하고, 회원과 환자를 대상으로 대체조제의 문제점과 피해 가능성을 알리는 홍보 활동에 나섰다.
의사 범죄화 아닌 국가 책임 강화해야
의협 김성근 대변인은 "의사를 처벌한다고 해서 의약품 수급 불안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의약품 공급 문제는 본질적으로 제약사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안이다. 국민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의사 범죄화가 아니라,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는 정부의 정책"이라며 국회의 역할을 촉구했다.
이어 "국회의원과 의사의 목표는 같다. 환자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가 국가적 책임을 강화하고 본질적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국민 안전과 환자 치료에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 안정적인 공급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의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법안 발의는 환자 안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 대변인은 또 "의사들은 환자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진료를 하고 있다. 불안정한 의약품 공급 문제를 의사 처벌로 해결하려는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가 본질적 해법에 집중해 달라"고 말했다.